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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령옥

no mingzi 2023. 4. 7. 22:42

[완령옥-영화 밖으로 나온 그녀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상해에 태어나 16세에 영화계에 데뷔해 19세에 상해 영화사에 입사한 완령옥은 그녀만의 아름다움으로 스타덤에 오르지만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스물다섯에 자살하고 만다. 그녀의 자살은 궁극적으로 당시 언론의 심한 비판이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이와 함께 그녀 인생과 그녀의 세 남자가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거라 추정 되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완령옥은 자신이 원하는 배역은 반드시 따내는 끈질긴 성격을 가진 한편으로 자신이 주로 연기했던 배역과는 대조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녀는 탕지산을 사랑하고 그에게 의지했지만 그가 부인과 이혼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 <신여성>이라는 작품에서 완령옥은 자신의 일을 하며 독립적으로 살아가다 아이를 위해 할 수 없이 몸을 팔게 되고 언론에 의한 왜곡된 보도 때문에 희생당하는 가련한 여인을 연기한다. 문제는 이 영화에서 언론이 그녀를 죽음에 몰아넣는 악인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기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영화에 대해 비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확대되어 결국 주인공인 완령옥의 사생활을 들춰내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언론의 비판. 이는 그 둘(신여성과 배우 완령옥) 모두에게 공통으로 가해진 시련이다. 그런데 <신여성>의 그녀는 한 시대를 앞서 간 당당한 신여성으로서 죽게 해준다. 하지만 완령옥의 자살은 그녀와는 상반되었다. 관지엔펑이 그린 완령옥을 보면 그녀의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언론의 공격 때문으로 그려진다. 그녀의 진실이 무엇 이든 간에 신여성과 비교해 그녀는 패배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가. 영화 중간에 노동자 배역을 따내는 부분이 있다. 그녀가 지금까지 했던 배역들이 노동자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감독의 말에 그녀는 당장 윗옷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연기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 역을 따내고 만다. 나는 이 장면이 그녀의 프로다운 그리고 당 시대의 수동적 여성들과 다른 새로운 여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녀의 남자 문제였다. 당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그녀는 남자와의 만남이 그리 많지 않은 동시대의 여성들에 비해 그 접촉 기회가 훨씬 많았다. 이런 배경은 자연히 그녀가 세 명의 남자를 만나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사랑에 차례차례 충실하게 대했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쉽게 사랑하고 즐기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영화에 가진 열정과 애정을 알고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연기했는지를 안다면 그녀가 신여성으로서 당당히 살았다는데 이의를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살고 있던 사회였고, 그녀 주위의 남자였고 우리들 자신이었다. 그녀가 언론의 비판으로 힘겨워할 때 그녀가 사랑했던 장다민은 그녀에게 도박에 쓸 돈이나 요구하는 치졸한 소인배였고, 그녀가 선택한 탕지산은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는 고려하지도 않은 채 파티에 화려한 옷을 꾸며 입히고 데리고 나가며 그녀를 함부로 대했다. 영화를 찍으며 마음을 주게 된 차이추성은 그녀가 도망가자는 제안을 물리쳤다. 이런 상황에서 비판에 시달리는 그녀에게 도피처가 쉼터가 되는 곳은 없었다. 결국 그녀 죽음으로 내몰렸다.

여배우라면 한 번쯤 나올 수 있는 스캔들. 그것으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하기에 그녀의 정신이 너무 나약하지 않았다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활동했던 1930년대의 시기를 감안해 본다면 그리 과장된 것도 아닐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누구누구가 연애한다더라 하는 스캔들이 배우의 생명을 좌지우지 했었다. 하물며 몇 십 년 전의 일인데다 여배우, 그리고 동거 스캔들이라면 그녀에게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완령옥을 연기한 장만옥 또한 자살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그녀의 심정을 공감하지 않았던가.

 

그녀의 자살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사람을 비교해본다.

 

먼저 슈테판 크라머라는 독일의 영화학자는 <중국영화사>라는 책에서 완령옥의 자살에 대해 관지엔펑과 꽤나 다른 시선을 보인다. 크라머는 <신녀>의 비극적 운명이 완령옥의 실제 운명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자살이 "억압받는 모든 여성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표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완령옥은 죽기 직전 중국의 가부장적 봉건주의를 비판하고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사회성 영화들에 출연함으로써 중국 민중들에게 희망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런 그녀의 이미지는 자살이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영구화됨으로써 좌파적 성향을 지닌 영화인들에게 귀감으로 자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검색

하지만 여기서 자살이라는 극적인 사건으로 영구화되었다는 말. 과연 자살에 영구화의 의미를 붙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자살이 더 나은 사회로의 투쟁의 수단이었다? 개인차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도피이지 대항이고 투쟁의 의미로는 잘못되었거나 부족한 감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관지엔펑의 인간적 해석에 더 공감이 간다. 그것이 비록 어떤 혁명적 의미를 가지는 데는 부족한 면이 있지만 시대의 현실과 그 현실에 희생당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는 스스로의 존재의 허망함과 회의, 그리고 배신. 그런 것들은 어떤 혁명의 대항보다 더욱 진실 되고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완령옥은 결국 봉건주의 사회에서 너무도 앞서갔기 때문에 혹은 너무도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 모두와 같은 혹은 인간과 같은 나약함을 가진 여자에 불과했다. 그녀가 아무리 민중해방을 원하는 노동자를 연기하고 혁명을 부르짖었더라도 결국 한 남자의 소박한 사랑을 바라는 한 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이를 보며 행복해 하는 그녀, 가계부를 쓰는 그녀, 사랑에 대한 배신에 슬퍼하는 그녀. 그것은 어떤 혁명으로 치유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아픔이다. 관지엔펑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바로 완령옥의 이런 인간적 모습인 것이다.

 

연기자로써의 그녀.....

 

연기자가 하는 연기. 그것은 어쩌면 단순한 따라하기정도에 그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연기자란 최소한 그가 어떤 인물을 연기하는 동안만은 진짜로 그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그들의 연기가 자신 스스로를 갉아 먹는 것이라고 했다. 본래의 그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인물에 몰입하는 것은 마치 그가 진짜로 다른 한 삶을 살아버린 것처럼 영혼이 줄어드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연기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절로 감탄을 내지르게 된다. 경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실연(實演). 그것은 정말이지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으로 실재로써 몰입할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이다. 그들의 몰입은 결국 상상이지만 매우 현실적으로 인물화 된다. 그것은 결국 관중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문제는 한 배우가 몰입한 가상의 인물이 평범한 로맨스의 주인공 뿐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문제, 철학적 문제 혹은 인간이 보여 질 수 있는 가장 타락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 지켜보는 관중에게도 불쾌감이나 절망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데 이를 실제로 연기하는 그들의 고통은 얼마나 클 것인가.

'신녀'에서 완령옥을 처음 보았다. 솔직히 그녀의 세세한 감정표현을 정확하게 집어 이야기할 순 없지만 약간의 과장되어 보이는 그녀의 표정 연기는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의 감정을 그리고 그 인물을 잘 표현해준 것 같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있을 때 정말로 성녀인 듯 했고 거리에 서 있을 때는 영락없이 창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선천적인 자질의 영향도 있겠지만 한편의 영화 같은 그녀의 생애도 그녀의 연기를 돕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녀의 남자와 시련....

 

탕지산과의 동거. 그것은 그녀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갈림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가 단지 탕지산의 부를 보았던 것인지 정말로 사랑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녀의 어리석은(결과만을 보았을 때) 선택은 그녀 인생의 전반을 흔들어 놓았다. 그녀가 장다민을 사랑했던 시기만 해도 그녀의 인생은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탕지산을 선택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랑으로 가득 찬 듯 보였던 두 연인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남자는 그녀에게 돈을 요구하는 치열한 소인배로 변하고 그녀는 탕지산의 돈을 노린 한 낱 첩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고 그녀의 모친과 소옥을 위해 주던 탕지산은 비열한 자본가의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고 있는 세상은 달랐던 듯싶다. 그녀는 장다민을 사랑했었지만 당지산 이라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비록 이전의 연인에 대한 사랑을 저버렸지만 헤어진 뒤 그가 요구한 보상 또한 충실히 이행 했다. 그녀는 당지산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이혼할 의사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다. 그와 동거를 시작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그녀는 새로 찍은 <신여성>이 기자들을 부정적으로 그려 냈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에 시달린다. 그것은 영화 자체의 비판을 시작으로 주연이었던 완령옥이라는 인물 자체를 비난 하는데 이른다. 여기에 장달민은 그녀가 당계산과 동거하면서 자신과 계속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거짓 제보한다. 그녀가 세 번째로 사랑한 <신여성>의 감독 차이추셩 마저도 자신과의 도피 제안을 거절하자 절망은 극도에 달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을 선택한다.

그녀가 자살하도록 이끈 것으로 언론의 비판 외에도 그녀가 연기자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혹시 어떤 문학작품이나 영화를 보고 그것에 몰입되어 세상을 보는 시각이나 가치관이 잠시 나마 바뀌었던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이라는 영화에서 보여 주었던 어떤 세상을 조정하는 또 다른 세상,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서처럼 개미의 모습을 관찰하는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존재'와 같은 내용은 잠시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형성해 준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의 흔들림일 뿐이지 그 지속성에는 한계가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배우라는 직업은 이런 허황될 수 있는 상황을 간접적이지만 직접 경험하게 되고 그 직업의 특성상 이것을 계속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완령옥과 이은주를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실을 떠나 일반적으로 말하듯이)그녀가 영화상에서 계속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다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고 해석하듯이 완령옥 또한 영화를 통해 만들어진 그녀의 감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캔들'이라는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영화처럼 살다가고 영화처럼 죽은 그녀. 그녀는 현실로 끄집어내려던 사람들 때문에 그녀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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