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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약황혼

no mingzi 2023. 4. 7. 22:42

-당신을 배반한건가요? 난 다시 살아가려구요.

 

 

다시 귀신이 되어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해버렸을 때 이미 결론이 나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그의 자유를 사랑했던 것 같다.

날 사랑해주지 않는 가족이란 이름의 그들 손에 팔리듯 시집을 갔다. 그렇게 맞은 남편이 제대로 된 사람일 리 없었다. 늘 아편에 찌들어 있던 남편을 등지고 나왔다. ‘노라의 집의 그녀처럼 말이다. 그 순간 지금까지의 나는 모두 버렸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그는 내게 세상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렇게 사랑을 키워갔다. 점점 그의 일에 깊숙하게 개입하면서 우리의 대화도 한층 깊어졌다. 하루는 조직 내에 배반자를 처단하는 일이 생겼다.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와 나는 총격을 당했다. 그는 즉사했고 나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조직원의 도움으로 어느 집에 머무르는 1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문은 사마루 사건을 크게 보도했고 나의 실종을 죽음으로 결론지었다. 이젠 가려한대도 내가 돌아갈 자리가 세상엔 없었다.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진정시키고 복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중심으로 작은 실마리까지 철저히 조사했다. 1여년이 흐르고 나서 빙빙 돌던 단서들은 결국 시작한 곳에서 끝맺었다. 그 놈은 바로 그날 모임이 있던 상점의 사장이었다. 그에게 몇 번 얼굴을 내비치며 내 존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의 숨통을 조이기에 충분했다. 그날 밤은 우리가 항상 함께 피우던 담배Era를 사러갔다. 마침 왠 남자 한명이 담배를 사서 돌아가고 있었다. 종업원은 모두 팔렸다며 황급히 문을 닫았다. 요 며칠 사장은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꼭 한 개피는 피우고픈 마음이었다. 막 돌아서는 남자를 잡아 담배를 빌렸다. 늦은 밤 담배를 빌리는 이상한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던지 그는 내 뒤를 따랐다. 헤어질 때 그는 대 여섯 개피 정도 남아있는 Era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가 준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다시 상점에 찾아갔다. 마침 사장이 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충분히 겁에 질려있는 그는 내가 총을 꺼내들기도 전에 옥상으로 도망가더니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제 절반은 해결한 것인가. 당신.. 기쁜가요?

 

처음에는 그저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렇게 아무하고라도 이야기하다보면 내가 살아있는구나 여겨지지 않을까 했었다. 하지만 담배 가게에서 만났던 그 남자는 내 생활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주었다. 그와의 만남은 잠시나마 여자로 살아가던 그때의 나를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여자였던 나.. 아직은 완전히 죽지 않았던 것인가...

 

사장의 죽음 후 상점에 심어둔 조직원을 통해 그를 살해한 놈의 용의자가 압축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남자와의 만남을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예상되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깊어지든 그렇지 않든 새로운 만남이란 내게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미 죽은 몸이 아니었던가. 아마 그는 귀신에 홀린 것쯤으로 생각하고 말겠지.

 

금새 잊으리라 여겼던 그의 방문이 잦아지면서 나는 그를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와의 헤어짐을.. 그에 대한 감정을.. 너무 얕보았던 내 자신을 책망했다. 한 번은 그가 잔뜩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을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며칠동안 깨어나지 않는 그에게 저녁이면 꽃을 가져다주었다. 그때쯤 난 그 복수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삶의 대한 의지가 복수에 대한 신념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은 내게는 새롭게 뻗어오는 삶. 그 자체였다. 낮에는 온종일 교회에 있었다. 그의 대한 복수라 정당화시켰던 죄의식이 약해진 내 신념을 비집고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온종일 기도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정말 귀신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하루는 그가 교회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하고 집으로 쫓아왔다. 내게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소리친다. 내 스스로에게 간절히 바라던 그 말을 퍼붓는 그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는 이대로 다시 살아갈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결국 그때부터 죽 일하고 있는 그 종업원이 남은 한 놈이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미 더럽혀진 손은, 이미 죽어버린 몸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리라. 그래 마무리를 지어야지.. 비가 세차게 내리던 저녁. 그곳에 찾아갔다. 이미 조직원은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미 깊은 총상을 입은 그는 내게 당신들이 무참히 죽인 사람들은 자신의 형제요, 형수며 조카였다고 울부짖었다. 그런가.. 내게 그를 죽을 권리 따윈 없는 건가.

이젠 내 살인의 정당성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그래. 복수라는 것..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내가 삶을 다시 느꼈던 그 때. 이미 마지막 남은 광기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다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빗속을 뛰쳐나오는데 그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용서해요. 사랑하는 이여. 어설픈 모양으로 세상을 헤매는 내게 삶의 의미를 확고한 신념을 심어주었던 당신. 서로의 마음을 맞추게 하고, 눈을 맞추게 하고, 입을 맞추게 했던 우리의 이야기들. 그것들이 당신이 사라졌을 때 함께 사라져버린 것 같네요. 그 사람을 보았나요. 날 이 어둠에서 끌어올려 준 사람. 미안해요. 하지만 난.. 다시 살고 싶어요. 당신의 사랑을 우리가 꿈꾸던 사상을 부정하진 않겠어요. 단지 제게 이전의 열정은 없어져버린걸요.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나의 신념이 부족했던 것이겠죠. ..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요? 당신을 잃고 나도 함께 없어져 버린 그때. .. 혼자가 아니라고 당신은 내 안에 있는 것이라도 얼마나 다독였는지 아나요? 하지만 이제 너무 지쳤어요.

지켜봐줄래요? 사랑이든 신념이든 그것을 떠남이 그것이 존재했던 것조차 부정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당신을 잊진 않을게요.

 

 

황혼이 질 무렵 귀신이라는 그 여자의 말이 진짜로 들릴 듯이 그렇게 어슴프레 나타나는 여인. 그 여자. 자신을 귀신이라고 숨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그녀가 귀신이 되었다는 건 그를 사랑한 그녀가,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인가. 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그녀는 그를 위해 복수해야 했기에 귀신을 자처하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렇다면 그 복수 후에 정말 귀신이라도 되려고 했던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며 남자의 담배를 뺏어 피는 그녀의 모습에 그녀가 그를 유혹하려고 하는 것인가 했다. 아니다. 그녀는 그를 유혹했다. 오랜 시간동안의 복수. 그것도 이미 죽어버린 사랑을 위한 것. 그것이 그녀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죽을 생각을 했을까. 슬픔에 지쳐 분노가 생기고 결국 복수를 결심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언제까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 있었을까.

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여자의 사랑을 에피소드마냥 서술한 영화는 한편으로 매우 담담하다. 여자가 그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 만난 그 남자는 시간이 지나 특별한 기억정도로만 그녀를 추억할지 모른다. 무정부주의자들의 혁명을 잠깐 내비치고 내내 그들의 미묘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것은 혁명과 같은 어떤 명분에 포장해놓은 듯 보인다. 한편으로 그 혁명의 진지함을 희석시키는 느낌. 그래 결국 사람과 사람이다. 그 혁명 속에 사람이 있고 조카에 대한 연인에 대한 복수가 있고 그것이 또 다른 사랑을 낳고 사람을 위한 혁명에 또 사람으로 인한 절망에 또 사람으로 인한 희망. 혁명을 부르짖는 중국의 영화들은 어딘가 그렇게 사람냄새가 짙게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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