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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궈모뤄

no mingzi 2023. 4. 7. 22:41

중국 최고의 지성인으로 일컫어지는 문인 궈모뤄(郭沫若)의 본명은 궈카이전(郭開貞)이다. 그의 예명은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지만 궈모뤄가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졌다. 그는 고향 쓰촨(四川)성 러산(樂山)에 있는 모수이(沫水)와 뤄수이(若水)라는 하천의 물을 먹고 성장했다는 의미로 하천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모뤄라고 지었다.

<헤럴드경제신문 참고.[기사보기]>

중국의 시인이자 희곡가이며 정치가이기도 했던 궈모뤄는 상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아래 자랐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전념했고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한다. 고등의과에 입학하여 의학공부를 할 때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 이때 성 루카 병원의 간호사 사토 도미코를 만나 부모의 반대를 무릎 쓰고 결혼하였다.

5.4운동을 시작되자 항일 운동 결사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에 항의하는 시를 발표하며 시작에 몰두하게 된다. 이후 청팡우, 위다푸 등의 동료들과 새로운 문예 잡지 <창간>을 발간한다. 이 때 그의 첫 시집 <여신>을 출간한다. 이렇듯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생활고로 아내와 일본으로 건너갔던 그는 가와가미 하지메의 <사회 조직과 사회 혁명>을 번역하면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이 일어나자 일본을 탈출, 상하이로 건너가서 항일전의 선두에 섰다. 국민정부와 함께 우한[武漢]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겼으나 장제스로부터 용공분자(容共分子)로 몰려 정치활동의 제약을 받게 되자 굴원(屈原)등의 사극(史劇)청동시대》 《십비판서(十批判書)등의 고대사상 연구에 정력을 쏟았다.”<교재요약>

 

이 시기가 그가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연구 성과를 이룬 시기이다. “그는 1930년대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첫 번째 개척자로 유물사관을 이용하여 중국고대사를 연구하여 중국고대사회연구,갑골문자연구등의 연구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인류 사회의 발전에 관한 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선진사회의 변천에 근거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전체 중국역사의 발전과정을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또한 다른 세계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저급에서 고급에 이르는 순서에 따라서 교체 되는 몇 가지 역사발전 단계를 경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중국 역사에서 계급이 있던 첫 번째 사회형태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는 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사학 중에서 고대사 연구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자료보기]

 

그의 이런 성과는 그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냐를 떠나서 중국 고대사에 관해 중국 스스로의 발전을 부정하던 이론에 대한 근거 있는 반박을 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 후 1949년 중공정부가 성립되자 그는 과학원장, 인민대표 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대일관계 개선에도 노력하여 1963년 중일 우호협회 명예회장이 되었다.”<yahoo 인물검색 사전>

 

이렇듯 중국의 지성인으로 인식되는 그가 비판 받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문혁시기의 자기비판이다. 그는 문혁시기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사상들을 모두 부인하고 스스로를 비판했다. 그의 비판 행위는 문혁시기의 비판운동의 불씨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 행위가 과연 잘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한명의 문인으로서 자신의 사상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어야할 그가 행한 자기비판. 그렇다. 사람은 어떤 계기로 자신이 주장했던 것들을 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의 시기가 문혁이라는 큰 혼란 속에서 궈모뤄가 무사히 비켜나갈 수 있는 역할이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도 역시 린뱌오와 함께 사회주의를 배반하고 공자를 숭배하는 과오를 저질렀다며 숙청대상이 되었다. 어쩌면 그의 비판은 당대 지식인들이 행했던 자기비판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전에 딩링에 대한 서적을 읽은 적이 있다. 문혁시기를 거쳐 간 지식인들의 이야기에는 꼭 당시의 기억들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전기는 문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 또한 잡혀가 노동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녀는 자기비판을 행하였다. 그런 지식인들의 모습은 이렇듯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래도 자신의 사상이 있고 신념이 있는 문학인인데 그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일 수 있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들의 자기비판은 단순한 비굴함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핑계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중국은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 등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은 모두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마지막 면모를 내비친다. 그것이 모든 것이 풍요로운 지금과 같은 시기가 아닌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던 단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던 절박한 때에 이루어졌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본래 사람이란 그 본성보다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다. 그의 비판은 결국 당시의 상황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되지 않을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완벽히 올바르다는 것도 없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있던가. 그의 행위를 너무 정당화 시키는 감도 없진 않으나 그가 이루어놓은 성과와 그가 행한 사상들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그의 비판 행위는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리라 믿는다.

중국의 문인들 중에 자신의 작품을 당이나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들은 당을 따르고 문학이란 그 속에 인민을 움직일 수 있는 어떤 교훈, 힘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가 세운 창조사도 본래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혁명문학을 주장하는 단체가 되지 않았나. 그가 살았던 사회. 그리고 당시 중국의 실정 같은 것들이 그를 순순 문학이 아니 사회적 문학으로의 길로 이끈 것이리라. 그것이 문혁의 상처로 인한 것이든. 자신의 비판행위로 인한 어떤 깨달음에 의한 것이든. 그의 잠재되었던 애국심이든. 결국 중국을 위해 힘쓰며 당을 믿고 따르라고 외치는 그에게서 진정 중국인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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